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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성 B-612

해가 저물어간다.


아니, 저물었다. 


피워두었던 모닥불도 따라 사그라들었다. 잿가루가 섞인 바람이 스치우고 지나갈 때마다 황량한 공터에서는 한숨과도 같은 소리가 일었다. 미련 따위는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저 검게 넘어가는 해가 사는 동안의 마지막으로 보는 해였다고 생각하니, 우습게도 눈물이 고였다. 가슴 속에 턱 막혀 응어리졌던 것들을 모두 토해낸 아이들의 얼굴이 후련해보였다, 때로는 공허해 보였다. 바보같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웃고 떠들던 아이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무거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들의 심연같은 마음 속을 감히 내가 함부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서로를 묵묵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조금의 지체없이 흘러만 갔다.


"우리 약속 하나만 하자."

"여기서만큼은 죽도록 행복하기, 더 이상 미련 같은거 안 남을 정도로 행복하기."


초라하도록 작은 약속이 문득 떠올랐다. 이 약속 하나로 울음을 삼키고 마냥 웃음짓던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잔상처럼 스쳐지나갔다. 웃음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는 새에 입꼬리에 울지못해 일그러진 미소가 고였다. 어쩌면 이 얼굴들을 조금만 더 보고싶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나는 이제와서 후회하는 걸까? 고작 7일간의 꿈만 같이 즐거웠던 시간들 때문에, 나는 19년을 아파하기만 했던 세상에 미련이라도 남은 것일까? 그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오 하는 대답을 내뱉었지만. 무언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 차올라왔다. 강간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 빚으로 남아버린 이혼 합의금, 화염에 뭉그러진 손, 배신으로 점칠된 상처와 사랑하는 내 장미의 죽음. 내게는 후회한다고 돌아갈 수 있는 조금의 세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독하게 후회하지 않는다, 라는 대답을 쏟았다. 나는 등 떠밀려 죽는게 아니야. 내 죽음만큼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야, 하고 말하는 듯이.


사람 마음이란게, 참 간사했다. 


너희들도 같은 마음일까 싶어 나는 뿌옇게 흐려진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어 가린 아이들, 담담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아이들,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아이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마주잡은 아이들. 각자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들에 나는 그저 눈을 감아버렸다. 입을 여는 이는 누구도 없었고, 해는 끝내 저물어 시린 밤이 침묵과 함께 그림자를 드리웠다. 계속되는 기다림에 지칠까, 나는 서둘러 라이터를 든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눈꺼풀이 답지않게 파르라니 떨려왔다. 그리고는 애써 담담한 척 잠겨가는 목소리를 다잡고는 정적을 깨뜨렸다.


"우리 약속했었지, 행복하기로."


대답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마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행복했어?"

 

물었다. 제발 행복했다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과 같이. 그러고는 하나하나 눈을 마주했다. 잊지말자, 기억하자, 우리 죽어서도 또 보자.


"행복했다."


나의 장미를 삼켰던 불길이 화려하게 치솟았다.



2015년 9월 13일.

 

사랑하는 여우들과, 나를 기다릴 장미에게.

소행성 B-612로 돌아간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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